인싸잇=한민철 기자 ㅣ SK하이닉스의 핵심기술을 유출한 혐의를 받는 중국인 직원에 최근 우리 법원이 중형을 선고했다. 그동안 국내 언론은 이 사건을 보도하며, 이 중국인 직원이 SK하이닉스의 기술을 유출한 간략한 과정과 법원의 선고 결과에 주목했다. SK하이닉스에 대해서는 피해자임을 강조할 뿐, 어떻게 직원 한 명이 다량의 영업기밀 자료를 유출할 수 있었는지, 특히 당시 SK하이닉스의 보안 상황은 과연 적절했는지에 대해 어느 언론도 제대로 말해주지 않았다. <인싸잇>은 당시 SK하이닉스 중국 사업장에서 ‘허술한 보안 실태’가 있었다는 의혹에 주목해 이 사건의 전말을 2회 보도에 걸쳐 파헤쳐보고자 한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지난 2019년 5월 중국 상하이국제컨벤션센터에서 열린 '상하이 포럼 2019'에서 개막 연설을 하고 있다. 사진=SK
수원고등법원 형사 제2-1부는 지난달 7일 영업비밀 국외 누설 등 혐의로 기소된 중국인 L씨에 대한 항소심 선고 공판에서 징역 5년에 벌금 3000만 원을 선고했다.
앞서 지난해 11월, 이 사건 1심 재판부는 L씨에게 징역 1년 6개월에 벌금 2000만 원을 선고했지만, 항소심 재판부는 더 무거운 형을 내린 것이다.
이 사건에 관해 다룬 그동안의 언론보도에 따르면, SK하이닉스 직원이던 L씨는 지난 2022년 6월 중국 대형 전자회사인 화웨이에 합격했다. 당시 그는 SK하이닉스의 중국 상해 지사에서 파견근무 중이었고, 화웨이로 이직해 사용할 목적으로 사내 영업기밀 문서를 출력해 회사 밖으로 가지고 나갔다.
이후 L씨가 퇴사 절차를 밟기 위해 SK하이닉스 이천 본사에 복귀해 보안검사를 받는 과정에서 영업기밀 유출 사실이 밝혀졌다. 하이닉스의 신고로 L씨가 경찰에 체포되면서, 그를 법정에 세울 수 있었다.
정리해보자면, SK하이닉스의 중국인 직원 L씨가 화웨이로 이직하기 전 하이닉스의 영업비밀 문서를 인쇄해 외부로 유출했고, 피해자인 하이닉스의 신고로 L씨가 붙잡혀 한국 법정에서 1심에서 징역 1년 6개월, 항소심에서 5년을 받았다는 게 이 사건의 골자다.
이 정도가 그동안 ‘SK하이닉스 중국인 직원 기술 유출’ 등으로 검색해 접할 수 있었던 언론보도의 내용이다.
최근 수년간 발생한 여느 기업의 산업기술 유출 사건과 크게 다르지 않은 사례라고 할 수 있고, 이 사건을 다룬 언론 대부분이 SK하이닉스를 일방적 피해자로만 그렸다.
<인싸잇>은 검찰 수사 및 법원 판결 내용 등 이 사건을 더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자료를 입수해 상세한 분석을 거쳤다.
이에 객관적 사실만을 근거로, SK하이닉스의 산업기술 유출 피해의 원인이 오로지 부도덕한 중국인 직원 한 명의 일탈에 있었던 것인지, 아니면 사측의 보안상 허점이 피해를 키운 것은 아니었는지 따져보겠다.
355→306→377→271... 나흘 걸쳐 수 천장 기밀 자료 인쇄
L씨는 국내 명문대학교의 이공계 학사 및 석사 학위를 취득한 뒤, 지난 2013년 SK하이닉에 입사했다.
L씨는 SK하이닉스의 반도체 기술 연구·개발 업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2020년 중국 상해 지사로 파견근무를 가게 됐다. 그는 파견 중에도 현지에서 동일 업무를 담당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는 2021년 12월 말 회사 승진 명단에서 탈락한 것에 불만을 품게 됐고, 중국 반도체 회사 구직에 나선 끝에 2022년 6월 화웨이에 최종 합격했다.
L씨는 이로부터 보름 뒤, SK하이닉스 상해 근무지에서 나흘에 걸쳐 회사 컴퓨터로 영업기밀 문서를 출력했다. 해당 자료에는 SK하이닉스가 HKMG(High-K Metal Gate) 공정을 도입한 세계 최고 모바일 D램(DRAM) 기술이 포함돼 있었다.
향후 그는 수사기관에서 “단순히 공부할 목적으로 인쇄했을 뿐”이라고 해명했지만, 그가 뽑은 자료는 엄연히 하이닉스의 영업기밀에 해당했고, 그 시기 화웨이로 이직이 결정돼 퇴사를 앞둔 상황이었으므로 설득력이 떨어졌다.
주목할 부분은 당시 인쇄한 자료의 어마어마한 양이다. 첫날 355장, 이튿날 306장, 셋째 날 377장, 넷째 날 271장으로 총 1309장에 달했다. 이것도 한 페이지에 2장씩 모아찍기한 것으로, 실제 4000장 이상의 문서를 인쇄했다.
L씨는 해당 문서를 가방과 쇼핑백에 나눠 담아 아무런 제재도 없이 회사에서 빠져나왔다고 한다. 얄궂게도 그는 마지막 인쇄를 마친 바로 다음 날인 2022년 7월 1일, 당당하게 한국에 입국해 SK하이닉스 이천 본사로 복귀한 뒤 보름이 지나 퇴직 신청을 했다.
보안검색대 설치도 안 된 SK하이닉스 상해 지사
일반 회사도 직원이 회사 프린터를 통해 하루에 300장 정도의 문서를 출력하면 의심을 받을 수밖에 없다.
아무리 상해 지사라지만 SK하이닉스와 같은 대기업이자 보안을 여느 곳보다 중요시해야 하는 기업에서, 그 많은 보는 눈과 듣는 귀를 피해 나흘 연속 300장에 달하는 문서를 아무 탈 없이 인쇄했다는 게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다는 지적이 나온다.
본지의 취재에 응해준 대기업 관계자는 “공용 프린터로 인쇄할 때, 어느 컴퓨터에서 인쇄했는지와 인쇄 파일명도 기록에 남는다”며 “하루에 100장이 넘는 다량의 인쇄를 하게 되면, 보안팀에서 즉각 인쇄 내역을 확인하고 해당 직원에게 그 사유를 조사하게 돼 있다”고 설명했다.
나흘에 걸쳐 연일 300장 이상을 인쇄했음에도 사내 보안팀에서 이를 인지하지 못했다는 건 납득가지 않는 반응이었다. 검찰 조사 결과, 당시 상해 지사에 근무하던 L씨의 동료 직원들 누구도 그가 이처럼 다량의 문서를 출력한 사실을 알지 못했다고 한다.
특히 해당 자료를 인쇄해 가방과 쇼핑백에 담아 유유히 회사를 빠져나간 점도 심각한 문제다.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를 이 사건 재판의 판결문이 제시해줬다. 1심과 항소심 판결문 모두 “SK하이닉스 본사와 달리 상해 지사는 보안검색대 등이 설치되지 않아 자료 유출이 쉬웠다” “SK하이닉스가 HKMG 기술에 대해 상해 지사 내에서 보안 조치를 충분히 취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라고 명시했다.
2부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