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싸잇=한민철 기자 ㅣ 현대모비스의 핵심 기술을 유출한 혐의를 받아온 전 직원들에 법원이 징역형에 집행유예를 선고했다. 법조계에서는 산업기술 유출 사건에 대한 양형기준을 대폭 강화하겠다고 밝혔지만, 이번 현대모비스 사건을 비롯해 최근 관련 재판에서 다수의 집행유예 판결이 나오면서 산업계의 법원을 향한 ‘솜방망이 처벌’ 원성이 더 커질 전망이다.
현대모비스의 핵심기술을 유출한 전 직원이 법원으로부터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사진=뉴데일리
지난달 29일 인천지방법원 부천지원은 영업비밀 누설 및 업무상 배임 미수 등의 혐의를 받는 현대모비스 전 직원인 A 씨와 B 씨에게 각 징역 1년 6개월 및 10개월에 집행유예 2년씩을 선고했다.
두 사람은 지난 2022년 2월경 현대모비스의 HUD(Head Up Display) 기술을 유출한 혐의를 받고 있다.
HUD는 차량 운전석 앞 유리창 상단에 차량 속도와 네비게이션 정보 등을 나타내는 시스템으로, 현대모비스가 차량용 인포테인먼트 시장에서 경쟁력을 갖추게 한 핵심 기술이다.
당시 A 씨 등이 유출한 HUD 연구개발 자료의 대부분은 현대모비스의 보안등급 상 가장 높은 영업비밀에 해당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수사 결과에 따르면, 사건 당시 HUD 개발 업무를 담당하는 연구원이던 A 씨는 경쟁사인 K사로 이직을 결심했다. 그의 이직은 이미 K사에서 근무하고 있던 전 모비스 동료 직원인 B 씨의 추천에서 비롯됐다.
A 씨는 모비스에서 퇴사하기 전 HUD 관련 기술 등 영업비밀을 K사로 유출하기로 마음먹고, HUD 3D 설계도면 파일 및 HUD 재료 등 개발 관련 자료 파일 수십 개를 USB에 복사하거나 휴대전화로 사진을 찍는 등의 방법으로 취득한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A 씨가 HUD 기술 자료를 유출하는 과정에서 “부정한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모비스를 퇴직하기 전 챙겨가야 할 자료가 무엇인가”라는 취지의 질문을 받은 B 씨는 ES(Engineering Specification)와 MS(Material Specification) 스펙 자료, HUD 평가 사양서 등 목록을 나열하며 “그 자료를 USB에 담아 나에게도 전달해 달라. 나도 집에서 열어보게”라는 취지로 말하는 등 구체적 유출 방법까지 제시한 것으로 드러났다.
현대모비스에는 다행스럽게도 A 씨에 대한 퇴직 예정자 보안 심사에서 이러한 유출 행위가 적발돼 큰 피해를 막을 수 있었다.
이 사건은 경찰의 수사가 진행되자 일부 언론보도를 통해 알려지며 현대모비스뿐 아니라, 현대자동차그룹 전체에서 논란이 된 바 있다.
재판부는 “피고인 A는 현대모비스와의 신뢰를 배반하고 모비스가 상당한 자금과 시간을 들여 구축한 영업비밀인 HUD 연구·개발 자료를 취득·유출했다”며 “자동차 전장사업 부문에서 현대모비스와 경쟁관계에 있고 장차 자신이 이직해 전장사업부에서 근무할 예정이던 K사에 이를 누설하려고 했다”고 판시했다.
또 “피고인 B는 피고인 A가 K사로 이직한 후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이용할 목적으로 현대모비스의 영업비밀을 취득·유출한 업무상 배임행위에 소극적으로 편승해 그 이익을 취득하려 했다”며 “자신의 업무 수행에 필요한 HUD의 설계·제작에 핵심 자료 등을 구체적으로 적시해 피고인 A에 제공해달라고 요구하는 등 피고인 A의 영업비밀 취득·유출과 업무상 배임행위에 적극 가담했다”고 밝혔다.
현대모비스는 두 사람에 대한 엄벌을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재판부는 A 씨가 취득한 영업비밀을 K사에 누설하기 전에 현대모비스로부터 적발돼 실질적 피해가 발생하지 않았다는 이유 등을 들어 집행유예를 선고했다.
법조계 ‘엄벌’ 약속했지만, 여전한 ‘솜방망이 처벌’
지난 2023년 8월 산업통상자원부는 국내 산업기술 유출 사건에 대한 처벌 수준이 낮다는 점을 지적하며, 양형기준 상향과 범죄 구성 요건 확대를 추진한다고 밝혔다.
이에 2024년 1월 대법원 양형위원회는 국가 핵심 기술을 해외에 유출하면 최대 징역 18년을 선고할 수 있도록 양형기준을 강화하는 등 기업의 기술 유출에 대한 엄격한 처벌이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산업계는 물론이고 법조계에도 퍼져나갔다.
그런데 이번 현대모비스 HUD 기술 유출 사건의 판결에서 알 수 있듯, 관련 사건에 대한 처벌이 집행유예에 그치는 사례가 여전히 적지 않은 상황이다.
실제로 지난해 6월 법원은 반도체 핵심 기술을 미국 회사로 빼돌리려 한 혐의를 받아온 삼성전자 전 수석연구원에게 징역 3년에 집행유예를 선고했다.
또 지난해 10월에는 회사의 핵심 기술을 취득해 중국 회사로 이직한 뒤 빼돌리려 했던 한 스마트폰 검사장비 생산 업체 직원들에게 법원은 부정경쟁방지법 위반 혐의만 유죄로 보고 징역형에 집행유예를 선고했다.
사법부는 산업기술 유출 사건에 대한 엄벌을 약속했지만, 여전히 솜방망이 처벌에 그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사진=뉴데일리
수원지방법원의 경우 지난해 11월 반도체·배터리 기술 자료를 취득해 경쟁사로 이직한 직원 2명에게 모두 집행유예를 선고했다.
<서울경제>의 최근 보도에 따르면, 지난해 7월 1일부터 올해 6월까지 ‘부정경쟁방지 및 영업비밀보호에 관한 법률’과 ‘산업기술의 유출방지 및 보호에 관한 법률’, ‘방위산업기술 보호법’ 위반 혐의로 선고된 판결 24건에서 13명의 피고인이 모두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고 한다.
회사의 핵심 기술을 유출한 것은 사실이지만, 사측에 실질적 피해가 돌아가지 않았다는 게 집행유예를 판단하는 주요 근거가 됐다.
이번 현대모비스 기술 유출 사건 역시 마찬가지의 이유로 사실상의 솜방망이 처벌이 내려지면서, 산업계의 법조계를 향한 기술 유출 사건에 대한 더 엄격한 판단의 요구가 거세질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