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탄조끼

법조인·시인 주광일

나는 오늘 미친듯이 거룩한 책만 읽었을 뿐,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다. 덕분에 나는 오늘 아무도 원망하지 않았다. 덕분에 나는 사람들의 마음을 얻기 위하여 사람들 앞에 나서면서도 죽음을 겁내서 방탄조끼를 입고 다니는 사람에게도 조금은 연민의 정을 가질수가 있었다.

2025.5.22


□ 주광일

1943년 인천광역시에서 태어나 경기고등학교와 1965년 서울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고, 1965년 제5회 사법시험 합격했다. 1979년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2006년에는 미국 노스웨스턴대학교 로스쿨을 수료했다.

검사로 있으면서 면도날이라고 불릴 만큼 일처리가 매섭고 깔끔하며 잔일까지도 직접 챙겨 부하검사들이 부담스러워했다. 10.26 사건 직후 합동수사본부에 파견돼 김재규 수사를 맡았으나 "개혁의지가 없다"는 이유로 원대복귀되기도 했다. 인천지방검찰청 검사장으로 있을 때 자신이 직접 언론 브리핑을 했던 인천 북구청 세금 횡령 사건, 인천지방법원 집달관 비리 사건 등 대형 사건을 처리했다.

서울지방검찰청 북부지청 차장검사로 있던 1989년 9월 18일부터 나흘간 홍콩에서 열린 아시아지역법률가회의에 참석하여 '한국경제 발전 과정에 있어서의 외자도입법의 역할'이라는 주제발표를 했다.

대전고등검찰청 차장검사로 있던 1992년 8월 경기고등학교와 서울대학교 다닐 때 써두었던 사랑을 주제로 한 시 60편을 묶은 《저녁노을 속의 종소리》(도서출판 빛남)라는 시집을 출판했다.

법무부 법무실장으로 있던 1994년 5월에 "앞으로 세계 경제질서를 지배할 우르과이라운드 협정은 우리의 경제에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되지만 아직 이에 대한 상세한 이해가 부족한 것 같다"면서 《UR 협정의 법적 고찰》이라는 국내 최초의 우르과이라운드 개설서를 발간했다.

김대중 정부가 출범한 직후인 1998년 3월 19일 대통령으로부터 국민고충처리위원회 제4대 위원장에 위촉됐으며 주광일은 임명 직후 "항상 국민의 편에 서서 국민의 아픔과 눈물을 씻어주는 위원회로 만들겠다"고 했다.

ㅡ 네이버 인물 검색 참조

■ 방탄조끼, 두려움의 껍질과 부끄러움의 침묵을 벗기는 시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한 시대를 겨냥한 시는 흔하다.

한 시대를 꿰뚫는 시는 드물다.

주광일 시인의 시 「방탄조끼」는 바로 그 드문 언어의 예에 속한다. 짧은 시지만, 그 안에 담긴 윤리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다. 이는 단순한 정치 풍자가 아니다. 두려움을 정당화하는 권력, 그 권력을 세운 이들의 침묵까지 함께 겨냥한, 내면의 자백을 요구하는 시적 고발장이다.

시인은 말한다.

“나는 오늘 미친듯이 거룩한 책만 읽었을 뿐,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이는 단순한 게으름의 고백이 아니라, 생각하지 않음으로써 외려 가장 깊이 생각하는 방식이다. 아무 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가장 예민하게 ‘무엇이 잘못되었는가’를 자각하는 태도인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 시인은 그 ‘잘못’을 정확히 겨눈다.

"죽음을 겁내 방탄조끼를 입고 다니는 사람"

— 이는 누구라도 쉽게 특정할 수 있는 오늘날 한 대선 후보의 모습이다. 국민을 대표하겠다며 국민 앞에 나선 자가, 정작 그 국민을 두려워하여 방탄 유리와 방탄조끼에 스스로를 가두는 모습은, 민주주의의 본질에 대한 모독이자 국민에 대한 모욕이다. 그러나 이 시의 날카로움은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진정으로 부끄러워해야 할 대상은, 단지 그 후보 개인만이 아니다.

그 후보를 지지하고, 그를 대변하고, 그를 세워 올린 정당과 지지자들 역시 이 부끄러움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국민을 믿지 못하는 자를 국민의 얼굴로 내세우는 정치,

그 정치적 판단을 여전히 옹호하며 방탄 유리 너머에서 정치를 말하는 정당,

그 침묵은 방탄조끼보다 더 두꺼운 자기기만이다.

방탄조끼는 단지 신체의 안전을 위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민심과 단절된 존재라는 자백이다.

그리고 그 방탄의 외피를 자랑스레 걸치게 만든 정치 집단의 윤리,

그 침묵과 외면이야말로 시인이 이 시를 통해 드러내려 한

‘시대의 부끄러움’이다.

주광일 시인은 시 말미에서 "조금은 연민의 정을 가질 수가 있었다"고 말한다.

그 절제된 연민은 시인의 너그러움이 아니라,

그 연민조차 허락되지 않을 위선의 자리에 서 있는 이들에 대한 마지막 경고이다.

시인의 삶은 말보다 더 투명하다.

법조인으로 평생을 살아오며 단 한 점 부끄러움 없이 청렴하게 살아온 이의 언어이기에,

이 시는 더 이상 상징이 아니다.

그의 말은 삶과 맞닿아 있고, 그 삶은 애국의 지점에서 멈추지 않는다.

주광일 시인의 시 「방탄조끼」는

권력을 향한 정면의 질문이며,

그 권력을 세운 손길들에게 던지는 윤리의 반사경이다.

부끄러움은 총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 총구가 겨누는 방향이 국민일 때 생겨나는 감정이다.

그리고 그 부끄러움을 모르는 자는

정치인이 되어서도, 국민의 대표일 수 없다.

시인은 조용히 말한다.

그러나 그 조용한 말 한 줄이,

방탄보다 더 강한 진실의 힘을 갖는다.

오늘, 그 진실이

방탄을 뚫고 국민에게 닿을 수 있기를 바란다.

ㅡ 청람 김왕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