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싸잇=심규진 교수 ㅣ 16세기 말 프랑스, 위그노 전쟁으로 나라가 두 동강 나던 시기. 한 사람의 등장은 평화를 가져오고도 불안을 남겼다. 앙리 드 나바르, 훗날 앙리 4세다. 위그노(개신교) 진영의 수장으로 프랑스 왕위 계승권을 가진 그는 결국 파리로 입성하며 이렇게 선언했다.
“파리는 미사를 들일 만한 가치가 있다.”
이 말은 종교적 신념보다 정치적 생존 그리고 ‘통합’이라는 명분 아래 현실을 택한 통치자의 상징처럼 남아 있다.
그리고 2025년 대한민국, 김문수라는 이름이 보수의 마지막 불씨로 주목받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그의 정치 여정 역시 좌파에서 시작해 우파의 상징이 되기까지 여러 차례 ‘정치적 개종’을 거쳤다는 점이다. 물론 이 개종은 종교가 아니라 이념과 진영에 대한 것이었다.
위그노에서 국왕으로, 운동권에서 보수로
앙리 4세는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 대학살 당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고, 이후 프랑스를 떠돌며 수차례 암살 시도를 겪었다.
그는 종교 내전을 끝내기 위해 1593년 천주교로 개종했고, 1598년에는 위그노에게 신앙의 자유를 보장하는 ‘낭트 칙령’을 선포하며 내전을 종식했다.
김문수의 경우도 유사하다. 그는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에 뿌리를 둔 좌파 출신이지만, 이명박 정부에서 실용 행정가로 부상하며 보수정권의 핵심 인물이 됐다.
이후 박근혜 탄핵 정국과 윤석열 정권에서 다시 정치 무대에 복귀한 그는 스스로를 보수의 상징이자 ‘노동자 출신의 우파’로 포지셔닝하고 있다. 그러나 어느쪽에서도 완전히 신뢰받지 못한다는 점 또한 닮아 있다.
전략인가 분열인가 – 통합 리더인가, 정치적 표류자인가
김문수가 모두의 예상을 깨고 국민의힘 대선 주자가 되는 과정은 드라마틱했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대통령 탄핵 반대를 외치며 한덕수와 단일화를 약속했던 그는 친윤층의 지지를 받아 경선에서 한동훈을 꺾었다.
그러나 정작 자신을 지지하는 듯했던 원내 친윤 세력은 경선 직후 다시 한덕수 단일화를 요구했고, 결과적으로 자신을 줄곧 지지했던 탄핵 반대 지지층과 심지어 탄핵 찬성파였던 안철수나 일부 한동훈계 등의 도움을 받아 후보 교체를 막아내는 기묘한 역전극이 벌어졌다.
원칙을 무시한 후보 교체 시도와 이로 인한 지지층의 분노, 당내 혼란은 마치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처럼 피아식별 없는 정치적 살육전 양상을 띠었다.
일련의 정치적 반전을 거듭하며 구사일생한 그에게는 박근혜와 윤석열 탄핵에 반대한 ‘꼿꼿문수’라는 별칭을 얻었지만, 동시에 ‘거짓말 정치’라는 냉소도 받았다.
과거 좌파 노동운동 출신이라는 이력은 강경 보수층의 의심을 불러왔고, 대구에서 김부겸에게 패배한 전력, 전광훈 목사와 연대 실패, 독자 세력 부재 등은 보수 정통 지지층 안에서도 확고한 기반을 확보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앙리 4세의 마지막은 ‘비극’이 아닌 ‘기반’이었다
앙리 4세는 단순한 통합의 정치가가 아니었다. 그의 선택과 결단은 결국 루이 14세의 절대왕정 기반이 되었고, 프랑스 근대국가의 시작을 열었다. 극단이 그를 공격했지만, 국민은 그의 통합 리더십을 기억했다.
김문수에게도 그런 기회는 남아 있다. 그는 여전히 윤석열 탄핵 반대라는 확고한 입장 그리고 보수의 도덕성과 현실주의를 연결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정치인이다.
그가 진정한 의미에서 대한민국 보수의 앙리 4세가 되고자 한다면, 이념과 세력을 초월한 설득력 있는 통합 메시지로, 지금 이 혼란의 시기를 새 질서의 출발점으로 만들 수 있다.
모든 정치적 리더는 어느 정도의 개종과 전략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것이 자기 보존을 위한 회색 지대가 아니라, 새로운 시대를 여는 통합의 전략이 되도록 만드는 일이다.
파리는 미사를 들일 만한 가치가 있었다. 그리고 지금의 대한민국 보수도, 진심을 들일 만한 가치가 있다.
□ 심규진 스페인 IE대학교 조교수 약력
정치 문법을 문화 전쟁의 관점에서 재구성하며, 우파의 문화적·정치적 복권과 승리를 이끄는 담론을 제시하는 커뮤니케이션 및 미디어 연구자다. 호주 멜버른대학교, 싱가포르 경영대학교(SMU) 등 세계 유수의 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하며, 싱가포르 교육부 미디어개발국 및 스페인 과학혁신부의 지원을 받아 국제 연구 프로젝트를 수행했다.
이화여자대학교에서 학사, 미시간 주립대학교에서 석사, 미국 시러큐스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국제 커뮤니케이션 학회(ICA)에서 최고 논문상을 수상한 바 있다. 또한 지역민방 청주방송과 미디어다음에서 기자로 활동했고, 여의도연구원 데이터랩 실장, 국방부 전략기획 자문위원 등을 역임하며 학문과 실무를 아우르는 보수 우파의 브레인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현재 유튜브 채널 〈국민스피커 심규진 교수〉를 통해 정파적 이해에서 자유로운, 독립적 민심과 데이터 기반 정치 평론이라는 대중적 실험에 나서고 있다.
▶ 유튜브 검색: @kyujinshim78
저서로는 『K-드라마 윤석열』, 『새로운 대한민국』(공저)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