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싸잇=심규진 교수 l 최근 영국 《이코노미스트(The Economist)》는 스페인을 ‘유럽에서 가장 역동적인 경제’로 평가하며 ‘스페인이 유럽 경제의 구원자가 될 수 있다’는 주장을 내놓았다. 관광, 축구, 태양의 나라로만 인식되던 스페인이 이제는 산업 재건의 중심국으로 재조명받고 있다는 것이다.
⊙ 마드리드 임대료는 뉴욕의 60~70%, 커피값은 암스테르담·뮌헨의 3분의 1 수준
⊙ 리튬·구리·우라늄·콜탄 등 전략광물 보유
⊙ ‘모든 것에 반대하는 문화’로 인한 사회적 갈등과 비용이 문제
⊙ 중국 전기차의 유럽 내 생산기지로 주목…중국의 ‘트로이의 목마’로 전락 우려
이 같은 평가는 과장된 낙관론으로만 보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유럽의 중심국들이 하나둘씩 무너지는 가운데 스페인은 상대적으로 ‘덜 망한 나라’이자 ‘생존자’로 부각되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유럽 대륙은 구조적 위기의 시기를 지나고 있다. 독일은 러시아에 대한 에너지 의존의 대가로 제조업 붕괴라는 장기 침체에 빠졌다. 프랑스는 연금 개혁조차 통과시키지 못하는 정치적 혼란 속에서 리더십의 공백을 드러내고 있다. 유럽연합(EU)은 친환경 규제, 정치적 분열, 관료주의적 통합 기조에 발이 묶여 더 이상 혁신이나 역동성의 기지(基地)를 자처하지 못하고 있다.
남미 출신 노동자 덕분에 임금 저렴
이 와중에 스페인은 뜻밖의 회복세를 보이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스페인이 무언가를 특별히 잘해서라기보다는, 유럽 전체가 침체하고 있는 와중에 상대적으로 구조가 덜 무너졌기 때문이다. 이러한 역설적 구도 속에서 스페인은 유럽 경제의 위기를 비추는 거울이자 탈출구로 동시에 거론되는 국가가 돼가고 있다.
그 배경은 단순하지 않다. 지정학, 인구 구조, 산업 비용 구조, 정치 환경 등 복합적 요인들이 겹쳐 작용한다.
필자는 최근 미국 뉴욕, 그리고 유럽의 주요 도시인 암스테르담과 뮌헨을 출장차 다녀왔다. 그곳에서 체감한 물가는 인상적이었다. 커피 한 잔에 5~6유로, 간단한 점심은 20유로를 훌쩍 넘는다. 유럽의 중심 도시들은 이미 생활비 측면에서 뉴욕과 거의 대등한 수준에 도달했다.
그러나 스페인은 다르다. 마드리드 중심지조차 임대료는 뉴욕의 60-70% 수준에 머무르며, 동네 바에서는 커피 한 잔을 2유로대에 마실 수 있다. 아침식사용 빵인 추로스와 함께해도 5유로 내외면 충분하다. 웬만한 외식도 1020유로면 충분하다.
이는 미국은 물론 서울보다도 저렴하게 느껴지는 수준이다. 뉴욕에서 베이글과 커피 한 잔에 10~15달러이고 레스토랑 식사는 20달러 이내에 해결하기 어려운 점에 비추어 보면 스페인의 생활비 구조는 그 자체로 강력한 생활 기반 경쟁력이자 산업 비용 안정성의 토대가 된다.
스페인 외곽 도시의 생활비는 미국의 여타 도시와 비교해 절반 수준으로 체감된다.
이런 구조는 남미 출신 이민 노동자 중심의 저렴한 인건비에 기반하고 있다. 마드리드 시내의 수많은 라틴계 젊은 노동자들이 월 1000유로 내외의 임금으로 일하며, 외식·유통·서비스업 전반에서 가격 안정의 핵심 축이 돼주고 있다.
더불어 스페인은 난민 문제에서도 상대적으로 자유롭다.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등은 EU의 난민 정책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그로 인한 정치적 피로감이 극우 정당의 약진으로 이어지고 있다. 반면 스페인은 유럽 대륙의 남단이라는 지리적 특성과 문화적 연속성 덕분에 라틴계 이민자 유입이 노동력 보완에 기여하고 있으며, 정치적 불안도 덜한 편이다.
전기료는 유럽 최저 수준
이러한 조건들은 미국의 고립주의 강화, 유럽 내부의 각자도생 현상 속에서 스페인을 오히려 ‘지정학적으로 안전하고, 문화적으로 유연하며, 경제적으로 가성비 좋은’ 공간으로 만들고 있다. 이는 마치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지 않은 프랑코 시대 스페인이 전후 재건의 의외의 수혜국이 되었던 역사적 구조와도 닮았다.
에너지와 교통비에서도 격차는 뚜렷하다. 독일 뮌헨의 지하철 기본요금은 2.99유로, 뉴욕은 2.9달러인데 마드리드 시내는 0.6유로에 불과하다. 전기료 역시 유럽 최저 수준이다. 태양광·풍력 중심의 재생에너지 인프라 확충, 러시아산 가스에 대한 낮은 의존도는 스페인을 ‘친환경 러시아’로 대체할 수 있는 에너지 거점국으로 만들고 있다.
실제로 화학, 제약, 금속 가공 등 에너지 집약적 산업은 스페인에서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리튬·구리·우라늄·콜탄 등 전략광물 보유국이라는 점도 산업 재편의 키워드가 된다.
스페인은 분명 저렴한 에너지, 풍부한 자원, 안정된 사회, 숙련된 인력을 갖춘 나라다. 유럽 제조업이 흔들리는 상황에서 이를 대체할 만한 역량과 조건을 일부 충족하고 있다는 점에서, 스페인이 새로운 산업의 거점이 될 수 있다는 주장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이념 우선의 정체성 정치’
그러나 이 나라가 진정으로 유럽 경제의 구원자로 자리매김하기 위해서는 넘어야 할 장애물이 많다. 그중 가장 구조적인 병폐는 이른바 ‘모든 것에 반대하는 문화(No to everything culture)’다.
풍력발전소, 광산 개발, 리튬 채굴, 관광지 확장 같은 개발사업은 사실상 지역 주민과 시민단체의 조직적 반대로 진척되기 어려운 구조다. 심지어 이미 완공된 원자력발전소조차 정치적 반발과 사회적 갈등으로 인해 단 한 번도 가동되지 못한 사례가 있다.
최근 몇 년간 유럽의 재생에너지 확대 흐름 속에서도 스페인에서는 태양광 패널 설치가 ‘경관 훼손’을 이유로 반대에 부딪히고, 풍력단지 조성조차 수년에 걸치는 환경영향평가와 민원 조정 절차 때문에 지연되고 있다.
이처럼 성장을 위한 모든 시도에 반사적으로 ‘노(NO)’가 나오는 구조는 스페인의 가장 큰 약점이자 미래를 가로막는 요인이다.
정치 구조 역시 걸림돌이다. 현 집권 세력은 급진 좌파와의 연정 구조로 인해 기업 친화적 정책보다 이념 우선의 정체성 정치에 기울어 있는 상태다. 규제는 강화되고, 세금은 높아지며, 에너지 기업은 사회적 악으로 취급받고 있다.
그 결과 외국인 투자 유치의 매력도는 낮아지고 있으며, 혁신 프로젝트는 민관 합의에 도달하기조차 어려운 상황이다.
실제로 스페인의 회복세를 ‘서방 최고의 경제’로 평가한 《이코노미스트》의 분석조차, 실질적인 성장률이 아닌 회복 속도만을 근거로 한 착시적 순위임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1인당 GDP는 여전히 동유럽 국가들보다 높지만, 생산성·창업 환경·혁신 역량 등 실질 경쟁력 측면에서는 여전히 개선이 필요하다.
‘잃어버린 가능성’인가 ‘숨겨진 엔진’인가
특히 주목할 부분은 스페인의 대중 전략에서 나타나는 지정학적 모순이다.
스페인은 유럽 2위 자동차 생산국이며, 생산성도 EU 평균의 3배에 달한다. 하지만 자체 브랜드는 거의 없고, 대부분 외국 브랜드의 중저가 차량을 조립·생산하는 구조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 전기차 브랜드들이 유럽 시장을 빠르게 잠식하고 있으며, 이에 대응하기 위해 EU는 고율 관세 부과를 논의하고 있다. 그런데 스페인 정부는 의외로 이에 반대 입장을 내놓고 있다.
표면상 이유는 ‘중국이 스페인산 육류에 보복관세를 부과할 수 있다’는 우려지만, 실상은 중국 전기차 업체들이 스페인에 생산기지를 설립할 가능성과 관련돼 있다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스페인이 중국의 유럽 내 생산기지로 전환될 경우 자국 산업의 수익성은 늘어날 수 있겠지만, 동시에 유럽 제조업 전체를 위협하는 ‘트로이의 목마’가 될 수도 있다. 이는 지정학적 독립성의 상실, EU 내부 분열, 대서양동맹의 균열이라는 더 큰 리스크로 연결될 수 있다.
스페인은 지금 유럽이 필요로 하는 거의 모든 요소를 갖춘 나라다. 하지만 성장에는 사회적 수용성과 정치 리더십, 장기 전략이 반드시 동반돼야 한다. 기회를 눈앞에 두고 이념적 고립에 빠지거나 규제와 반발에 갇힌다면, 이 나라는 또 하나의 ‘잃어버린 가능성(lost potential)’으로 남게 될 것이다.
지금 이 순간, 스페인은 유럽의 산업 재건을 이끌 수 있는 ‘숨겨진 엔진(hidden engine)’이자 전략적 시험대에 서 있다. 문제는 과연 그 시동을 걸 준비가 되어 있는가 하는 것이다.
□ 심규진 스페인 IE대학교 조교수 약력
정치 문법을 문화 전쟁의 관점에서 재구성하며, 우파의 문화적·정치적 복권과 승리를 이끄는 담론을 제시하는 커뮤니케이션 및 미디어 연구자다. 호주 멜버른대학교, 싱가포르 경영대학교(SMU) 등 세계 유수의 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하며, 싱가포르 교육부 미디어개발국 및 스페인 과학혁신부의 지원을 받아 국제 연구 프로젝트를 수행했다.
이화여자대학교에서 학사, 미시간 주립대학교에서 석사, 미국 시러큐스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국제 커뮤니케이션 학회(ICA)에서 최고 논문상을 수상한 바 있다. 또한 지역민방 청주방송과 미디어다음에서 기자로 활동했고, 여의도연구원 데이터랩 실장, 국방부 전략기획 자문위원 등을 역임하며 학문과 실무를 아우르는 보수 우파의 브레인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현재 유튜브 채널 〈국민스피커 심규진 교수〉를 통해 정파적 이해에서 자유로운, 독립적 민심과 데이터 기반 정치 평론이라는 대중적 실험에 나서고 있다.
▶ 유튜브 검색: @kyujinshim78
저서로는 『K-드라마 윤석열』, 『새로운 대한민국』(공저)이 있다.